한은경
1.
산골마을 출신 룸메이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빠가 서울에 오면 흙밟을 일 없다고 했는데, 진짜로 신발에 흙 묻을 일이 없다.”
놀라움과 그리움과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말투였다.나도 서울에 정착한 뒤로 흙을 밟을 일이 없어졌다. 고향 집은 밭 위에 지어졌고, 창문을 열면 밭이 보인다. 농촌인 우리집과 서울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서울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인 지형이 되었고, 흙은 한강공원이나 가로수밑, 산에만 계획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지하철역과 쇼핑몰로 모든 땅의 레이어가 연결되어 있으니, 실외로 나갈 일도 잘 없었다. 엄마가 딸을 보러 종종 서울에 오면, 바람을 맞지 못해 늘 갑갑해하실 정도다.
나는 서울땅 위를 거닐면 신발이 깨끗하게 유지되니까 좋았지만, 자연을 좋아했던 나에게 흙 묻을 일 없는다는 건 그 이상의 의미였다. 흙과 함께 살아가는 게 나와 룸메이트, 그리고 우리 전체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고민해보게 된다.
2.
작년 이맘때쯤 수업에서 접한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가 떠올랐다. 나는 물론이고 인문학계 존재론적 전회에 큰 영향을 미친 이 책의 내용을 이 글에서 잠시 소개할까한다. 이 책은 인류학과 생태학을 공부한 저자가 아마존 숲의 생활상을 4년간 관찰하고 사색한 결과물이다. 주된 내용은 언어가 없는 숲의 생물들도 세상을 표상하며 그들만의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인데, 그것을 저자는 퍼스의 기호학을 빌려와 설명하고 ‘생각한다think’는 단어로 표현한다.
콘의 목적은 인간의 언어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아닌 동물, 식물, 숲 전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설명하는데 있었다. 그가 인용한 찰스 앤더스 퍼스는 소쉬르의 기호학과는 다르게 인간 언어 이상의 보편적인 의미작용에 걸친 기호학 이론을 보여준다. 퍼스는 기호작용을 세 단계로 분류한다. 첫째 ‘아이콘’은 닮음의 원리로 작동하는데, 차이를 무시하고 공통된 형상을 포착하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원숭이는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이나 특정한 소리를 이전에 경험했던 위험한 상황과 ‘닮은 것’으로 인식한다. 둘째 ‘인덱스’는 어떤 것의 흔적으로, 인과적 연결을 읽는 능력을 말한다. 예를 들면 원숭이가 갑자기 큰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 자체는 포식자가 아님을 알면서도 무언가 위험한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고 추론한다. 여기서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는 위험을 가리키는 인덱스가 된다. 인덱스는 아이콘적 사고를 바탕으로 다른 것의 존재를 가리키는 흔적이다. 콘에 따르면 생명체들은 끊임없이 인덱스를 읽으며, 이러한 인덱스 해석 능력이 바로 비인간 생명체의 사고(thought)이다. 셋째 심볼은 인간 언어의 영역이다. 예를 들어 ‘원숭이’라는 단어는 실제 원숭이와 닮지도 않고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우리가 그 의미를 이해하는 건 사회적 약속 때문이다. 콘은 우리의 언어와 문화가 주로 심볼에 의존하며, 인류학이 오랫동안 심볼만 연구해 왔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콘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의미 생성은 언어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서, 아이콘과 인덱스를 통한 해석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생각은 인간만의 능력이 아니라 생명 일반의 특성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숲이 인간처럼 언어를 사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숲을 구성하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아이콘과 인덱스를 통해 끊임없이 서로를 해석하고 반응하는 거대한 기호 과정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콘이 아마존의 루나 족을 관찰하면서 ‘혼맹soul blindness’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여기서 혼soul은 서구적 의미의 비물질적 정신이라기보다 ‘다른 자기self를 하나의 주체로 인식하는 능력’에 가깝다.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의 관점을 읽지 못하고 모든 것을 단순한 물체나 자원으로만 본다면 그 상태를 콘은 혼맹이라고 설명한다. 콘은 현대 서구 사회가 어느 정도 혼맹 상태에게 빠져있다고 본다. 동물은 기계로, 숲은 자원으로 강은 물질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흙을 밟지 못한다는 건 혼맹이 되어감의 징후가 아닐까. 가설을 수립했다.
3.
인간 외 자기들도 기호를 해석하고 경험한다면, 그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우리는 이를 상상하고 탐구함으로써 심볼의 자의성과 추상성이 간과하는, 다른 자기들이 인간보다 더욱 더 예민하게 감각하는 세계를 사유할 무궁무진한 길을 열 수 있다. 콘에 따르면 아이콘적 혼동이 부류kind를 창출한다. 인간이 뭉뚱그려 ‘땅’으로 부르던 것에는 사실 다양한 (심볼이 아닌) 이름들을 붙어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씨앗이 발아하는 환경 조건을 떠올려볼 수 있다. 씨앗은 온도, 수분, 산소, 빛 등의 조건들이 고루 충족될 경우에만 싹을 틔운다. 그들에게는 계절의 흐름을 감지하는 아이콘적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도구를 활용하지 않으면 측정 불가능한 질산염 농도, 염분, 토양 압력, 특정 미생물의 존재까지도 작은 개별 씨앗은 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씨앗에게 발아란 환경을 해석한 뒤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가깝다.
질산염 농도가 높으면 다른 식물이 죽고 난 자리일 수 있으며, 이는 곧 충분한 양분의 인덱스가 된다. 또 산불이 잦은 호주지역의 식물 일부는 불이 지나간 뒤 생기는 화합물인 카리킨을 감지해 발아를 시작하기도 한다. 지렁이가 많은 흙에서는 지렁이가 만든 통로나 배설물이 산소가 잘 통하고 유기물이 풍부한 환경이라는 복합적인 신호로 나타날 것이다.
이렇듯 씨앗은 심볼을 사용하지 않지만 인덱스를 읽는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나의 ‘흙’인 것이 씨앗에게는 따뜻함, 화학물질, 균류, 경쟁식물의 존재 등이 얽혀 있는 매우 세밀한 기호 환경이 된다. 흙 그 자체는 행위주체성을 갖지 않기에 ‘생각한다’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흙 속의 생명체들은 그 자체가 기호가 되어 읽고 읽힌다.
4.
이렇게 콘의 생각들을 엿보면서, 흙 밟을 일 없다는 룸메이트의 말이 왜 이리 내게 기억에 남는지 알게 되었다. 도시 생활 중 신발에 흙이 묻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징후였다. 나조차도 흙을 하나의 심볼로만 부르게 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자기들의 존재를 잊어가는 과정을 의미했다.
이 사실을 깨닫자 흙을 잃어버린 도시에서, 자기들은 어떤 기호과정을 거칠지 상상하게 된다. 가로수나 도로 화단에서 떨어진 씨앗은 아스팔트를 여행하다가 발아하지 못한 채 생명력을 소진할 것이다. 도시에서 인간이 아닌 생명체를 본 기억이 있던가? 길가의 비둘기가 움직이는 모양새가 갑작스레 생경하게 느껴져 한참을 멍때리기도 한다.
잠시 도시를 벗어날 수 있다면 다시 흙을 만지러 고향으로 가고 싶다. 땅을 파는 게 재밌었던 때로 돌아가 인간이 아닌 혼들이 사는 모양새를 관찰하고 싶다. 이런 소망을 품으니 횡단보도 앞에 서면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던 버즘나무 껍질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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