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현
사흘 밤을 새우고 학교 선배 자취방 바닥에 누워 취한 채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다 깨달았다. 나는 안 보이는 많은 것들을 그러려니 하며 살아왔구나.
라식 수술을 하고서 안구 건조가 심해졌다. 인공눈물을 점안하지 않으면 피곤할수록 앞이 잘 뵈지 않는다. 늘 그러다가 그날에서야 눈치챈 거다. 뵈는 것도 없으면서 이렇겠거니 저렇겠거니 하며 좋아요를 누르고 타자를 쳐 가며 관성으로 살았구나.
그러면 그 관성은 누가 만들어 준 것이지? 누가 나를 이 길로 굴러가라고 밀어 주었지? 역사란 무엇인가. E. H. 카의 명저를 처음 접한 지 꼭 6년이 되어서야 그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있었던 어떤 일, 그 특정한 일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세 빨갱이들이 나보다 더 잘 풀어줄 터이니 나는 말 그대로 사史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역사를 우습게 보는 이들이 많은 요즘이다. 항상 5월은 이슈가 많다. 5.18 광주 민주 항쟁 기념일과 노무현 前 대통령 서거일(5월 23일)이 둘 다 5월이고,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이 있는 가정의 달이라 행사를 많이들 계획하는 때기도 하다. 일이 많으면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올해는 좀 무난히 넘어가나 하고 있었더니 스타벅스에서 시원하게 병크를 터뜨렸다. 탱크데이. 끽하면 멸공이니 뭐니 하던 정용진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공식적으로 사과문을 내놨고 스타벅스 코리아 대표는 경질됐다. 앞으로 잘 살피겠다,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 정말 죄송하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다. 원래 담당자도 아닌 직원 한두 명이 임의로 맡아서 마케팅하는 중소기업 구멍가게도 아니고, 신세계그룹에서 굴리고 있는 무려 스타벅스에서 어떻게 이런 글이 나오지?
5월 23일 예정돼 있던 래퍼 Rich Iggy 콘서트는 티켓값을 52300원으로 책정했다가 노무현재단의 대응에 취소되었다. 이쪽은 아예 데뷔 초부터 고인 능욕, 소아성애 가사로 이래저래 뭇매를 맞던 사람인데 이제서야 갑자기 사죄하니 법적 대응이 무서웠던 걸로 밖엔 안 보인다. 해당 콘서트에 함께하기로 했다가 취소될 때 같이 사과한 다른 공연자들도 마찬가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가 주기로 한 거잖아? 잃을 게 생기면 뉘우치게 되나 보다.
역사가 뭘까? 역사가 뭐길래 그렇게 중요하고, 역사가 뭐길래 몰라도 되는 그냥 옛날이야기인 걸까? 내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과거를 조용한 기록 취급하는 것은 독재자들이 좋아할 법한 역사관이다. 전두환 정권이 『역사란 무엇인가』를 불온서적 취급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생각하지 않고, 선동하는 대로 휘두르려면, 근시안을 씌워서 맹목적인 추종자로 만들려면 성찰할 줄 모르는 멍청이일수록 적합하니까.
인간은 명분으로 산다. 신을 모시고, 주군 봉신 맹세를 맺고, 정략혼을 한다. 전쟁은 3만 명이 죽어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고, 단 한 사람이 죽어서 일어날 수도 있다. 사회가 움직이는 모든 일에는 명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명분은 역사가 만들고, 기각한다.
역사를 왜 배워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모두가 들어온 답변은 비슷할 것이다. 과거의 기록을 통해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할 통찰력과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서,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에... 이것들 하나하나가 다 역사를 배울 훌륭한 이유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역사를 배워야 할 가장 실용적인 이유는 저 명분을 검증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오렌지색 돼지와 시바견을 탄 나치당원이 전 세계를 선동하고 이마 넓은 영감탱이가 피해자 행세하며 한 종족을 학살하는 이 혼란기에 심지를 세우고 살기 위해서, 사기꾼 발밑 연단을 세울 벽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역사를 배워야 한다.
미국 원주민은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이민세관단속국의 강제추방에 명분이 없음을 알게 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대로 살아온 민족이 레바논 주민들의 조상이었으며, 신에게 땅을 약속받았던 노아의 후손들도 가나안 땅을 돈 주고 사서 살았음을 알면 이스라엘이 자행한 학살을 지지할 수 없다. 5월 광주에서 무참히 짓밟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5.18 민주화운동을 괴뢰 활동이라 날조할 수 없다. 악의적 프로파간다는 얄팍하다. 모든 것이 사실과 진실에 근거하고 정당성을 취한 행동은 잘못되기 극히 어렵기 때문에, 악인들은 얕은수를 부린다. 이에 저항할 방법은 앎, 오직 앎뿐이다. 무지한 자들은 분노한다. 오직 분노한다. 분노의 근거는 돼지들의 뇌(혹은 입)에 맡기고, 자신들은 분노만 한다. 아는 자들은 공감하고, 슬퍼하고, 행동한다. 유튜브에서 시뻘건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박힌 선동 영상들을 보고 요즘 세상을 한탄하며 살아갈지, 배운 만큼 보면서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로 행동하며 살아갈지는 지금 당신이 배우는 것들에 달려 있다.
생물학자 최재천 박사님이 자주 사용하는 문장이 있다. "알면 사랑한다." 물론 도널드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와 베냐민 네타냐후까지 사랑하라는 말은 아니다. 억울함과 분노를 터뜨리기 전에, 몰라서 미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생각해 보고 배울 계기 삼게 되길 바란다는 뜻에서 이 문장을 인용하며 글을 맺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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