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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비엔날레를 구경하는 제주도 출신 학부생 1

월간반항행동 5月호: 역사

by 안티소셜( )클럽 2026. 5. 23.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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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경

미술계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심사위원단이 사임하고 황금사자상은 관람객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러시아관 앞에서는 pussyriot이 구호를 외쳤고, anga를 중심으로 여러 국가관은 일시적으로 문을 닫거나 파업에 동참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관은 정부 검열 논란 끝에 문을 닫았다. 

2024년에 처음으로 베니스를 다녀오고 2년 뒤의 소식을 다시 찾아보면서 나는 여러 기사와 이미지들을 계속 들여다보게 되었다. 많은 이슈들은 결국 한 곳을 가리켰는데, 그건 바로 이스라엘이었다. 국가폭력과 그것을 둘러싼 이미지의 문제였다. 

나는 제주도 출신 학부생이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국가폭력이 예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서 배우게 된다. 제주에서는 국가폭력이 먼 역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제주 4.3 사건은 익히 알려졌다시피, 한국전쟁 이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던 목소리를 국가가 무력으로 진압하려했고, 이것에 맞선 무장대와의 갈등 상황에서 제주도 섬 전체가 빨갱이로 몰리고, 결국에는 민간인들이 그 과정에서 학살된 일련의 사건을 말한다. 

4.3 사건은 아직 분단인 우리나라에게는 영원히 미제사건이다. 4.3 평화공원에 있는 백비만 보아도 그걸 알 수 있다. 이름 붙여지지 않은 채, 정치적 입장을 빼고 빼내어 만든 ‘사건’이라는 단어는 공허하다.

 그래도 알려진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제주 4.3 사건이 섬 밖으로 알려지는 데에는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삼촌>의 역할이 컸다. 1978년 발표된 <순이삼촌>은 사건 발생 약 30년 뒤에 발표되었다. 그때까지도 제주 4.3은 공식적으로 말할 수 없는 사건임에는 물론 빨갱이 낙인이 따라붙는 사건이었다. 제주 지역 내부에서도 침묵해야 했던 기억이었다. 그런 와중에 <순이삼촌>의 발표는 국가가 침묵시킨 기억을 공론장으로 끌고 나온 행위였다. 그러나 이러한 용감한 발표 이후에도 군부독재 아래에서는 유통이 쉽지 않았다. 현기영 작가는 1년 뒤 군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사흘 동안 고문을 당했으며, 순이삼촌은 곧장 금서가 되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통이 어려웠다. 

시간이 더 지나서 <순이삼촌> 이후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 연작은 1989-1992년에 걸처 발표되었다. 나는 중학생 때 처음으로 그의 작품 <발포>를 봤다. 선생님은 제목을 가리고 그림만 보여주었는데, 나는 단번에 제목을 맞췄다. 누가 봐도 발포하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강요배 화백의 그림은 적어도 내게는 아주 강렬했다. 지루한 수업 와중에 내가 매일 지나다니던 그 길 속에서 사람들이 총성을 듣고 도망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당시 사진도 얼마 남아 있는 게 없어서 아직도 강요배의 그림은 제주 4.3 사건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곤 한다. 이미지의 힘이란 대단했다. 

이처럼 예술가의 작업은 저널리즘이 기능하지 못할 때, 저널리즘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국가폭력의 상흔을 드러낼 수 있다. 4.3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지금은 유네스코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아직까지도 백비는 백비이지만, 4.3 사건의 문제를 주목하게했다는 점에서 현기영과 강요배의 역할은 지대하다. 

베니스 비엔날레를 둘러싼 여러가지 소식들을 전해들으면서, 제주를 떠올리고, 한 가지 사실을 불현듯 알게되었다. 국가폭력은 언제나 이미지를 둘러싼 싸움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국가폭력을 자행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폭로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미술작품이나 만드는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고 국제사회적인 뉴스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목소리를 내는지 이해되었다. 어떤 이미지는 전시되고, 어떤 이미지는 검열되고, 어떤 기억은 국가관 안에 들어가고 어떤 기억은 밖으로 밀려난다. 

현기영 작가는 나중에 4.3의 학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잊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 번 그는 ‘4.3 이야기를 안하고는 문학적으로 한발짝도 떼어 놓을 수가 없다는 압박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그 말은 아도르노가 말한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문장과도 닮아있다. 

그래서 어떤 예술가들은 작업을 하는 대신 시위를 하고, 전시를 거부하고, 국가관의 문을 닫는다. 

글을 쓰면서 내가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가 되었다고 상상해본다. 강요배를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시한다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도 남아공의 검열처럼 제주 4.3 사건을 국제무대에 선보이는 것에 대한 저항을 받게 될까? 결국에 한국관도 파업에서 더 나아가 불참까지 하게 되면 어떡하지? 한국인들은 이정도 일 가지고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이리저리 상상해봤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혼란은 내게도 여러 혼란을 안겨주었는데, 현기영과 강요배의 작업을 되돌아보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미술계는 세상을 바꿀만한 충분한 힘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폭력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계속해서 현재로 되돌려놓는다. <순이삼촌>과 <동백꽃지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예술은 집단 기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이 연약한 상흔예술이 반복해서 존재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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